Johan Cruijff
제목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천재? 토탈사커의 창시자? 지저스? 결국 가장 유명한 별명 중에 하나인 하늘을 나는 네덜란드인 (플라잉 더치맨) 을 나름대로 요약해서 정했다. 요한 크루이프, 네덜란드가 낳은 위대한 천재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공중 부양 하는 크루이프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웃음.) 아, 22일날 업데이트 하면서 제목을 2차수정했다. 하늘을 나는 자 -> 14번의 전설을 쓴 으로 바꾸었다. 아 이거 참 어렵도다 ^^
프로필
이름 : 풀네임 Hendrik Johannes Cruijff (요한 크루이프, 영어표기에서는 종종 Cruyff로 표현되기도 한다)
생년월일 : 1947년 4월 25일
신장/체중 : 176cm / 67kg
포지션 : FW, MF
등번호 : 14번
국적 : 네덜란드
국가대표 : 48경기 33득점
수상 : 1971, 1973, 1974년 유럽최우수선수상 (발롱도르 3회)
하늘을 날던 요한 크루이프의 이야기
국가대표 통산 50경기도 채 안 뛰었던 선수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유명해 질 수 있었는가?
네덜란드가 낳은 천재 요한 크루이프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세계축구계를 흔들었던 위대한 선수였다. 축구역사상으로도 손꼽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유명한 선수이기도 하다. 현역시절에는 유럽최우수선수상을 무려 3차례나 받았는데, 이것은 그가 처음이었으며 후에 플라티니와 반바스텐만이 3회 수상을 기록할 수 있었다.
토탈사커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오만하게 보일 정도의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선수.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도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1996년을 끝으로 감독직까지 그만두었지만, 현재에도 스페인의 바르샤와 네덜란드 축구계에는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별명은 하늘을 나는 네덜란드인. 또한 이니셜을 요약한 J.C.가 예수 그리스도(지저스 크라이스트)의 약자와 동일하고 축구계의 신화를 써내려 갔기 때문에, 지저스 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축구계의 스타 중의 스타지만, 정작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상당히 짧다. 그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대단한 애연가 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훗날 심장에 무리가 와서 1991년 수술을 받은 뒤 담배를 끊었지만, 1997년에 심장의 병이 재발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분 담배를 너무 사랑하면 몸을 해칩니다 (...)]
네덜란드의 유명한 명장 리누스 미셸 (미켈스 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감독이 혁신적이고 조직적인 전술 이른바 토탈 사커를 만들어 냈는데, 이것을 몸소 체화해서 완벽하게 플레이로 보여준 이가 바로 요한 크루이프이다. 그는 필드 11명의 중심에 위치해서 발군의 밸런스 감각과 탁월한 화려한 테크닉, 시합의 흐름을 읽는 통찰력, 미셸 감독의 의사를 실현해내는 전술 이해력까지, 선수로서 이 모든 방면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필드의 지휘관으로 팀을 이끌면서, 상황에 따라서 공격수도 되고 때로는 최후방까지 내려와서 수비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키 플레이어이자 게임 메이커로서 적절한 곳에 정확히 마지막 패스를 주기도 하였으며, 피니쉬 슛을 날리면서 공격을 주도하였다. 공격에 관해서는 모든 게 가능했던 놀라운 선수였다 하겠다. 원터치 플레이를 즐겨했으며, 독특한 타이밍에 패스나 슛을 날려서 상대팀들은 곤욕을 치루었다고 한다. 특히 1974년 서독월드컵 때, 브라질 전에서 놀라운 점핑 발리 슛을 날리면서 관중을 매료시켰는데, 애칭인 하늘을 나는 네덜란드인과도 잘 연결된다고 하겠다.
리누스 미셸 감독과는 1965년 아약스시절부터 FC바르셀로나와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까지도 같이 호흡을 맞추었는데, 요한 크루이프는 미셸 감독의 전술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확고한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차범근 감독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가 미셸 감독이라고 하며, 또한 미셸 감독은 유럽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지도자 중에 한 명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 앞에서 항상 축구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는 타고난 천재이기도 하지만, 그 재능은 당연한 말이지만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서 그만큼의 실력을 가지게 된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어릴 때부터 가녀린 체구였기 때문에, 혹시 병(결핵)이 아닌가 싶어서 주위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도 길거리에서 축구기술을 열심히 닦으면서 건강하게 잘 자랐던 요한 크루이프. 어릴 때부터 아약스의 큰팬이었던 그는 10살 때 아약스의 하부조직에 입단하는데 성공한다. 워낙 약해보여서 당시에 합격가능성이 1%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실력하나로 테스트를 통과해 합격했으니, 어릴 때부터 축구기술이 출중하긴 출중했나보다.
16살 때 성인팀에 합류한 요한 크루이프는 드디어 17살 때 데뷔전을 가지게 된다. 데뷔전부터 골을 터뜨린 이 뛰어난 신동은 이윽코 19살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이후에는 요한 크루이프의 전성시대를 이루어 나간다. 아약스에서 1973년까지 뛰면서 놀랍게도 무려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을 이끌며, 유럽최우수선수상도 2번이나 받는다.
재밌는 이야기로 그의 유명한 등번호 14번에 관한 이야기. 아약스 때부터 14번을 달고 다니던 크루이프였는데, 당시에는 등번호가 확실하게 고정된 게 아니였다고 한다. 따라서 선수들은 경기시작 전에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결정을 하곤 했다. 생각해보자. 사실 14번은 뒷번호이고, 추측해 볼 수 있듯이 당시 주로 대기선수가 달고 있던 번호였다. 왜냐하면, 축구는 11명이 주전이니 1번부터 11번까지 베스트 번호가 제일 인기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데 요한 크루이프는 14번을 고집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감독이 왜 14번을 고집하는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크루이프는 당당히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붙이지 않은 이 번호를 지금부터 자신의 번호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결국 그의 말대로 이 14번은 요한 크루이프를 알려주는 대명사같은 번호가 되어버렸다. 이로 인해 현재에도 14번은 인기번호 중에 하나가 되었으며, 바르샤의 앙리도 요한 크루이프의 14번을 물려받아서 뛰고 있다. 그리고 2007년 4월 25일. 크루이프의 60살 생일을 맞이해 아약스는 1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 14번을 자신의 번호로 만들어 버린 선수, 그가 바로 요한 크루이프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왜 하필 14번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9번은 디 스테파노, 10번은 펠레의 번호니까 혼동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표현했는데, 그가 두 레전드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크루이프는 펠레를 좀 더 높게 평가했다고 알려져있다.) 또한 디 스테파노, 펠레 에 이어서 자신만의 신화를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1973년 요한 크루이프는 200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이적금으로 FC바르셀로나(바르샤)로 이적한다. 바르샤에서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당시 침체되어가던 바르샤에서 구세주로 떠오르며, 22경기 연속 무패를 질주하며 결국 리그 우승을 이끈다. 그 어마어마한 경기장의 바르샤 팬들이 얼마나 열광했겠는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정말 멋진 골을 터트리는가 하면, 특히 유명한 사건은 엘 클라시코 라고 불리는 유명한 레알 마드리드와의 라이벌경기에서 원정을 떠난 FC바르셀로나가 놀랍게도 5-0 으로 레알을 대파한 사건이다. 요한 크루이프가 뛰면서 레알이 홈에서 바르샤에게 0-5 로 참패당한 이 역사적 경기는 아직도 바르샤 팬들에게 이야기 되고 있다고 한다. 이후에도 5시즌을 FC바르셀로나에서 뛰면서 많은 타이틀을 획득한다.
1974년 서독월드컵,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끌고 출장한 요한 크루이프. 마치 시계 같다는 놀라운 평가를 받은 이 토탈사커의 팀은 완성도 높은 무서운 조직력과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면서 결승전까지 오른다. 아쉽게도 이 결승전에서 요한 크루이프는 당대 최고의 서독 수비진에게 철저하게 봉쇄당하면서 1-2 로 패배하고 만다. 이 결승전 경기는 지금까지도 가장 훌륭했던 월드컵 결승전 중에 하나로 현재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요한 크루이프는 74년 월드컵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고, 그 해의 맹활약에 힘입어 생애 3번째 유럽최우수선수 (발롱도르) 에 선정되었다.
서독 월드컵에서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 이 놀라운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그리고 명성이 한없이 높았던 요한 크루이프, 다음 월드컵의 유력한 우승후보임에 틀림없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요한 크루이프는 본선에 불참해 버린다. 당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 대한 항의였다. 이로 인해 월드컵 무대의 출장은 1대회 7시합 3득점이 공식기록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나, 개인적으로 필자는 크루이프의 이 행동에 대해서 높이 평가한다.)
선수로서의 마지막 시기는 북미축구리그에서 보내기도 하였으며, 스페인 레반테를 거쳐서, 네덜란드 리그로 다시 복귀한다. 아약스와 페예노르트에서 마지막 시기를 보냈는데, 전혀 녹슬지 않은 기량으로 관중을 매료시켰다고 한다. 1984년 37살의 나이로 공식적으로 은퇴하는데, 마지막 두 시즌에서는 네덜란드리그 연간최우수선수에 뽑힐 정도로 훌륭한 활약을 끝까지 보여주었다.
바로 다음해인 1985년, 38살의 나이로 아약스의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이 때의 제자들은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선수들이다. 대표적으로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레이카르트, 반 바스텐, 베르캄프 등이 있다. 크루이프 이후 네덜란드 축구계를 이끌던 유명한 선수들이다. 1988년 드디어 FC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바르샤의 주력선수들을 대거 물갈이 시키며, 재건에 착수하는 크루이프 감독. 많은 투자를 감행해서 살리나스 등의 스타 선수들을 하나둘 영입하고,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등과 함께) FC바르셀로나는 1990~1994년 4시즌 연속으로 프리메라리가 정상에 선다. 특히 1991-92시즌 유럽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서는데, 이것이 바르셀로나로서는 처음이었다. 요한 크루이프가 만든 이 빛나는 FC바르셀로나는 엘 드림 팀 이라고 불리면서 바르샤의 영광의 역사로서 기억되고 있다.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FC바르셀로나를 최정상에 우뚝 세운 요한 크루이프, 그가 바르샤에서 열광적인 지지와 환영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1996년 건강 상의 이유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는 어드바이스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해설자로도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아직 현역감독으로도 충분히 뛸 수 있는 나이인터라, "크루이프 감독"을 외치는 목소리도 여전히 높다고 전해진다.
추가 - 2008년 2월 21일. 로이터 통신은 요한 크루이프가 아약스의 기술고문으로 취임한다고 밝혔다. 과연 아약스는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을 것인가? 흥미롭게 지켜봐야 할 것이다.
유명한 발언도 무척이나 많지만, 필자에게 인상적인 어록 몇 가지는 다음이었다.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나다." 30대 중반이 지나가고 있던 크루이프가 다시 네덜란드 아약스에서 뛸 때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있자, 요한 크루이프는 일갈하며 "안 된다고 결정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고 나다" 라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보란 듯이 놀라운 활약을 보여준다. 은퇴에 관해서는 마지막 경기 후에, 축구화를 가볍게 던지면서 은퇴를 직접 결정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의 카리스마와 자신감이 어떠했는지를 잘 표현해 주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여기서 배울 것도 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좌지우지 하지 않고, 자신이 결정하면서 길을 가는 자세는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공격적인 스타일을 좋아했는데, "아름답게 좋은 경기를 해서 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보기 흉하게 이기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라" 는 발언은 유명하다. 1-0 으로 지키면서 이길 바에는 공격하다가 4-5 로 패하는 편이 낫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단순한 승리보다는 좀 더 멋진 축구를 원하던 요한 크루이프는 이러한 스타일 덕분에 더욱 많은 사랑을 받았기도 하다. 그는 멋지고 환상적인 축구로 계속 승리해 나가는 것을 꿈꾸던 선수였다.
"축구경기는 우선 관중을 즐겁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아... 정말 멋진 발언이다. 조금 오버해서 말하자면, 그의 경기를 보고 있자면 어쩔 수 없이 요한 크루이프의 팬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죽 했으면 월드컵 때, 준우승팀의 선수에게 대회 최우수 선수상을 주었겠는가.
"재능 있는 젊은이에게 좌절을 경험시켜야 한다. 좌절은 그 선수를 성장시키는 최고의 약이기 때문이다." 좌절, 실패, 이런 것을 약으로 생각했던 사람.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야 더욱 강인해진다고 생각했던 사람. 요한 크루이프, 그는 인간적으로도 너무나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는 어려움과 비판을 경험하고, 그것을 딛고 일어설 줄 알았다. 37살의 나이에 연간 최우수 선수에 당당히 뽑히며 은퇴했던 빛나는 선수였다.
끝으로 시합에 졌을 때, 요한 크루이프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공격하는 방법이 부족했다." 그는 다른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다만 그 때 그 때 새로운 공격을 계속해서 창조해 나갔을 뿐이다. 그는 진정 패배 속에서도, 포기를 모르는 강인한 선수였다.
참으로 글이 길어졌고, 정리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끝으로 5분 짜리 멋진 영상을 준비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잘못된 부분이나, 수정되어야 할 부분에 대한 지적을 환영합니다. 이 글은 일본의 위키 등 여러 일본 웹사이트를 베이스로 하여 작성되었음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