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비행기 라는 별명을 가졌던 진델라
축구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스타들이 많다. 잉글랜드의 던컨 에드워즈도 그렇고, 이번에 살펴볼 스타 진델라도 그렇다. 오스트리아 축구 사상 최고의 스타로 불리는 진델라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프로필
이름 : Matthias Sindelar (마티아스 진델라, 혹은 마티아스 신델라)
생년월일 : 1903년 2월 10일 (1939년 1월 23일 작고)
신장/체중 : 179cm / 63kg
포지션 : FW
국적 :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 43시합 27득점
종이의 남자, 진델라의 이야기
진델라는 잉글랜드의 유명한 피터 크라우치 처럼 마른 체형이다. 상대수비수 사이를 어느새인가 빠져나와서 골을 넣어버리는 그의 인상적인 모습 덕분에, 사람들은 그를 두고 Man of Paper (종이비행기, 종이의남자) 라고 불렀다. 1930년대 유럽최강이라 불렸던 원더팀 (=놀라운팀) 오스트리아 국가대표를 이끌었으며,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오스트리아 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인정받고 있다.
진델라는 무릎에 지병을 앓아서 어린 시절에 수술을 했다. 그래서 더욱이 몸을 부딪히는 파워풀한 플레이 보다는 기교와 테크닉으로 플레이하는 스타일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발군의 득점감각과 예술적인 테크닉으로 좋은 활약을 펼치던 진델라는 이윽코 1926년 오스트리아 국가대표팀에 발탁된다. 대표팀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던 진델라는 어느덧 오스트리아의 중심선수가 되어 있었다.
진델라가 오스트리아 대표팀을 이끌던 1930년대. 1931년부터 1934년까지, 3년동안 오스트리아 국가대표팀의 성적은 21승 6무 3패를 기록하였다. 30경기 동안 무려 101골을 넣었다고 한다. 아마 당시에 FIFA랭킹이 있었다면 분명 최상위권에 오스트리아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국가대표간 30번 경기를 해서 3번 밖에 지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이 오스트리아가 얼마나 강력한 팀이었으며, 왜 원더팀이라 불렸는지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진델라는 이 놀라운 팀의 중핵이자, 우아한 플레이와 예술가 같은 외모 덕분에 축구계의 모차르트 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모차르트도 오스트리아 출신)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연히 오스트리아는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승승장구하던 오스트리아는 준결승전에서 난적을 만난다. 개최국 이탈리아였다. 결과는 0-1 오스트리아의 패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이 경기에서 심판이 심하게 이탈리아 쪽으로 편파판정을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당시 독재자 무솔리니의 시절이었는데, 심지어 심판매수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대회를 두고 사상최저의 월드컵대회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진델라도 이 경기에서 거친 이탈리아의 태클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아아... 이 때 월드컵이 이탈리아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열렸다면, 아마 1934년의 월드컵 우승트로피는 오스트리아의 것이 되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1934년 월드컵 4강에 만족해야만 했던 오스트리아. 그래도 여전히 1930년대의 오스트리아는 강호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윽코 시간은 흘러 1938년 프랑스 월드컵, 오스트리아는 역시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예선을 통과하며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부터이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가 바로 나치 독일에 의해서 강제 합병되고 만 것이다. 순식간에 오스트리아도, 오스트리아의 국가대표팀도 공중분해 되어서 사라지고 말았다. 당대 유럽 최강팀으로 손꼽히던 오스트리아의 대표팀은 이렇게 역사적인 비극으로 해체되고 만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축구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 오스트리아의 뛰어난 선수들을 하나하나 영입하기 시작한다. 진델라는 독일의 요청에도 고령과 부상 등의 이유로 계속 참가를 거부한다. (또한 진델라가 유태인이라 독일 대표팀에서 고의로 뽑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1938년 4월, 독일과 구오스트리아의 경기가 있었다. 진델라는 구오스트리아의 캡틴으로 참가한다. 나치 독일은 진델라에게 압력을 넣는다 "오스트리아가 이겨선 안 된다, 반드시 독일에게 패하도록 하라."
진델라가 어떻게 했을까? 독일 대표팀 차출도 거부한 사실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이, 그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위해서 열심히 뛰었다. 나치 독일의 압력을 무시하고 진델라는 한 골을 넣으며 종횡무진 맹활약 하였으며, 비운의 구오스트리아 대표팀은 실력답게 독일 대표팀을 2-0 으로 완파한다. 비록 1938년 월드컵에 오스트리아는 출전할 수 없었지만, 이 경기는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저력을 잘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해인 1939년. 36살의 진델라는 자기 방에서 연인과 함께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일산화탄소에 의한 사고사 라고 발표되었지만, 오스트리아 대표팀을 잃고 절망에 빠져서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경찰의 수사문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략으로 살해당했다는 음모설도 있다.
1998년 오스트리아에서 20세기 최고의 선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설문투표를 했는데, 진델라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는 오스트리아 최고의 전설적 선수로 평가받은 것이다. 안타까운 비운의 천재 진델라. 오늘은 그가 태어난지 정확히 105년이 되는 날이다. 불행하게 고인이 된 선수에 대해서 묵념을 보내며 글을 마친다.